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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와라노 나리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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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귀족이자 시인으로, 825년경에 태어나 880년에 사망했다. 그는 헤이제이 천황의 손자였지만, 신분 강하를 통해 아리와라 씨 성을 받았다. 닌묘 천황, 몬토쿠 천황, 세이와 천황, 요제이 천황 대에 걸쳐 궁정에서 관직을 역임했으며, 특히 몬토쿠 천황의 아들인 고레타카 친왕을 섬기며 와카를 지었다. 그는 육가선과 삼십육가선에 포함될 정도로 뛰어난 와카 실력을 자랑하며, 《고킨와카슈》를 비롯한 칙선 와카 모음집에 다수의 작품이 실렸다. 나리히라는 《이세 이야기》의 주인공 '옛날 남자'와 동일시되어 연애담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삶과 문학은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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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와라노 나리히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노 탄유의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1648년)
가노 탄유의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1648년.
본명아리와라노 나리히라 (在原 業平)
출생825년
사망880년 7월 9일
사망 장소불명
언어고대 일본어
분야와카
주제자연, 낭만적인 사랑
배우자알려지지 않음
파트너여러 명
자녀아리와라노 무네야나
아리와라노 시게하루
다카시나노 모로나오 (전승에 따름)
요제이 천황 (전승에 따름)
아리와라노 아이코 (결혼 상대: 후지와라노 야스노리, 자녀: 후지와라노 기요쓰라)
친척헤이제이 천황 (할아버지)
후지이노 후지코 (할머니)
간무 천황 (외할아버지)
후지와라노 미나미코 (외할머니)
아보 친왕 (아버지)
이토 내친왕 (어머니)
아리와라노 유키히라 (이복 형)
오에노 오톤도 (이복 형)
오에노 지사토 (조카)
아리와라노 모토카타 (손자)
신분
관위종4위상
직책구로도노토
우근위권중장
가문
씨족아리와라 씨
가족 관계
아버지아보 친왕
어머니이토 내친왕
형제자매가네미 왕
나카히라
유키히라
모리히라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교케이
미나모토 히로시의 처
여자
인간 관계
주군닌묘 천황
몬도쿠 천황
세이와 천황
요제이 천황

2. 출신

나리히라는 헤이제이 천황의 제1황자였던 아보 친왕의 아들이자, 간무 천황의 딸 이토 내친왕의 아들로, 부모 모두 천황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고귀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구스코의 변으로 황통이 사가 천황의 자손으로 넘어가면서 황위 계승과는 멀어졌고, 826년 아버지 아보 친왕이 신적강하되어 형 아리와라노 유키히라와 함께 '''아리와라노 아손'''이라는 가바네를 받았다.[18]

825년에 태어난 나리히라는 아버지 아보 친왕을 통해 헤이제이 천황의 손자였으며, 어머니 이토 공주를 통해 간무 천황의 손자였다. 아보 친왕의 다섯 번째 자녀였지만, 나가오카쿄에서 살았던 이토 공주의 유일한 자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리히라의 시 중 일부는 그의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824년 구스코 사건에 연루된 아보 친왕은 헤이죠쿄(오늘날의 나라현 나라시)에서 쓰쿠시 국(오늘날의 후쿠오카현)으로 유배되었고, 나리히라는 아버지의 유배 중에 태어났다. 826년 아보가 헤이죠로 돌아온 후, 나리히라와 형제들인 아리와라노 유키히라, 아리와라노 나카히라 등은 평민이 되었고 아리와라라는 성씨를 받았다. 학자 오에노 오톤도 또한 나리히라의 형제였다.[18]

관계이름
아버지아보 친왕
어머니이토 내친왕
아내기노 아리츠네의 딸
장남아리와라노 무네야스(?-898)
차남아리와라노 시게하루[18]
아리와라노 비시[19] - 후지와라노 야스노리의 아내, 후지와라노 키요츠라의 어머니


3. 경력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닌묘 천황 때 사콘에노쇼겐(左近衛将監)과 구로도(蔵人)를 겸하며 천황을 가까이서 모셨고, 가쇼 2년(849년)에는 종5위하 관위를 받았다. 그러나 몬토쿠 천황 때에는 승진이 정지되고 관직 기록도 없어 불우한 시기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조간 4년(862년) 종5위상 서위는 정6위상에서의 승진으로 추정되어 위계 강등 가능성도 제기된다.[5]

세이와 천황 때 다시 승진하여 조간 4년(862년)에 종5위상이 되었다. 사효에곤노스케(左兵衛権佐), 사콘에노곤노쇼조(左近衛権少将) 등의 무관을 역임하며, 조간 11년(869년)에는 정5위하, 15년(873년)에는 종4위하까지 올랐다.

요제이 천황 때에도 간교(元慶) 원년(877년) 종4위상, 3년(879년)에는 구란도노카미(蔵人頭)까지 올랐다. 구란도노토 임명에는 황태부인 후지와라노 다카코의 추천이 있었다는 추정도 있다.[6][7][8] 몬토쿠 천황의 아들 고레타카 친왕을 섬겨 와카를 바치기도 하였다.

간교 4년(880년)에 사망하였다. 최종 관위는 구란도노카미 종4위상 행(行) 우콘에노곤노주조(右近衛権中将) 겸 미노곤노카미(美濃権守)였다.

3. 1. 관직 경력

닌묘 천황 때 사콘노에노쇼겐(左近衛将監)과 구란도(蔵人)를 겸하며 천황을 가까이서 모셨다. 가쇼 2년(849년)에는 종5위하 관위를 받았다. 그러나 몬토쿠 천황 때에는 승진이 정지되고 관직 기록도 없어 불우한 시기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세이와 천황 때 다시 승진하여 조간 4년(862년)에 종5위상으로 승진했다. 사효에노곤노스케(左兵衛権佐), 사콘노에노곤노쇼조(左近衛権少将), 우콘노에노곤노쇼조(右近衛権中将) 등의 무관을 역임하며, 조간 11년(869년)에는 정5위하, 15년(873년)에는 종4위하까지 올랐다.

요제이 천황 때에도 간교(元慶) 원년(877년) 종4위상, 3년(879년)에는 구란도노카미(蔵人頭)까지 올랐다. 몬토쿠 천황의 아들 고레타카 친왕을 섬겨 와카를 바치기도 하였다.

간교 4년(880년)에 사망하였다. 최종 관위는 구란도노카미 종4위상 행(行)사콘노에노곤노주죠(右近衛権中将) 겸 미노노곤노카미(美濃権守)였다.[5]

아래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관직 경력을 정리한 표이다.

시기관직관위
조와 12년 (845년)좌근위장감
조와 14년 (847년) 1월 12일구로도(장관)
가쇼 2년 (849년) 1월 7일종5위하 (직서)
조간 4년 (862년) 3월 7일종5위상
조간 5년 (863년) 2월 10일좌병위권좌
조간 5년 (863년) 3월 28일차시종
조간 6년 (864년) 3월 8일좌근위권소장
조간 7년 (865년) 3월 9일우마두
조간 11년 (869년) 1월 7일정5위하
조간 15년 (873년) 1월 7일종4위하
간교 원년 (877년) 1월 15일우근위권중장
간교 원년 (877년) 11월 21일종4위상
간교 2년 (878년) 1월 11일겸사가미권수
간교 3년 (879년) 10월 11일구로도노토(장관), 우근위권중장・사가미권수 여원
간교 4년 (880년)겸미노권수
간교 4년 (880년) 5월 28일졸거 (구로도노토 종4위상 우근위권중장 겸 미노권수)


3. 2. 정치적 상황

그는 주로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궁정에서 높은 혈통을 배경으로 관직 생활을 했다. 841년 내대신부 우위소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좌위소장과 참내를 거쳤다. 849년에는 종5위 하에 올랐다.[1]

임시 좌위부 부마두, 차관, 임시 좌근위부 소장, 마료두, 임시 우근위부 중장, 사무이 사가미를 역임하고 종4위 상까지 승진했다. 말년에는 참내와 미노의 임시 사무이를 맡았다.

문학사학자 도널드 키인은 ''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묘사되는 나리히라가 헤이안 시대 궁정 귀족이 갖춰야 할 모든 자질, 즉 높은 혈통, 수려한 외모, 뛰어난 시적 재능, 승마와 무술 실력, 유능한 행정 능력 등을 겸비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자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면모가 부각되지 않아 겐지 등 다른 헤이안 문학 영웅들과 차별점을 보인다고 언급했다.

일본삼대실록》(901년)은 나리히라에 대해 "우아하고 수려한 외모를 지녔으나, 방종하고 거리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자이야기》는 나리히라가 세이와 천황의 후궁인 藤原高子|후지와라노 다카코일본어와 사랑에 빠져 수도를 떠나 동쪽으로 여행하게 된 배경을 암시한다.[1] 이 사건으로 인해 《삼대실록》에 기록된 그의 품계가 종5위 하에서 정6위 상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 종5위 상으로 복귀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삼대실록》 기록이 사건 순서의 오류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닌묘 천황 재위 기간에는 사콘에노쇼겐과 구로도를 겸하며 천황을 가까이 모셨고, 가쇼 2년(849년) 무위에서 종5위하로 직서되었다. 몬토쿠 천황 시대에는 승진이나 관직 기록이 없어 불우한 시기를 보냈으며, 조간 4년(862년) 종5위상 서위는 정6위상에서의 승서로 추정되어 위계 강등 가능성도 제기된다.[5]

세이와 천황 시대에는 조간 4년(862년) 종5위상에 서임된 후 사효에곤노스케, 사콘에곤노쇼쇼 등 무관직을 역임했다. 조간 7년(865년) 우마노카미로 옮겨 10년 이상 재직하며 조간 11년(869년) 정5위하, 조간 15년(873년) 종4위하로 승진했다.

요제이 천황 시대에는 겐교 원년(877년) 종4위상, 우콘에곤노추조에 서임되어 근위차장이 되었고, 겐교 3년(879년) 구로도노토에 임명되는 등 요직을 맡았다. 구로도노토 임명에는 황태부인 후지와라노 다카코의 추천이 있었다는 추정도 있다.[6][7][8]

4. 인물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헤이제이 천황의 손자이자 간무 천황의 손자로, 매우 고귀한 혈통을 지녔다. 그러나 구스코의 변 이후 황통이 사가 천황의 자손에게로 넘어가면서, 826년에 아버지 아보 친왕의 상표로 인해 신적강하하여 형 아리와라노 유키히라 등과 함께 아리와라 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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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삼대실록』의 졸기에는 "체모한려(體貌閑麗), 방종불구(放縦不拘)"라고 기록되어 있어, 예로부터 미남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또한 "략무재학(略無才学), 선작왜가(善作倭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초적인 학력은 부족했지만 와카에는 뛰어났음을 의미한다.[10]

가인으로서 『고금와카집』에 30수를 시작으로, 칙찬와카집에 87수가 수록되어 있다.[11] 아들 무네야스, 시하루, 무네야스의 아들 모토카타 모두 가인으로 알려져 있다. 형 유키히라와 함께 매사냥의 명수였다고 전해진다.[12]

기노 아리쓰네의 딸과 결혼하여 기 씨 가문과 교류하였다. 한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40세 축하에 와카를 헌상하고,[13] 장남 무네야스의 딸은 후지와라노 구니쓰네와 결혼하는 등 후지와라 씨와도 교류하였다.

만년에 구로도노카미(蔵人頭)라는 요직에 올랐으며, 정치적으로도 형 유키히라와 함께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는 『이세 이야기』 등에 묘사된 인물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가계도
관계이름
아버지아보 친왕
어머니이토 내친왕
아내기노 아리쓰네의 딸
장남아리와라노 무네야스(?-898)
차남아리와라노 시게하루[18]
아리와라노 비시[19] - 후지와라노 야스노리의 아내, 후지와라노 키요츠라의 어머니


4. 1. 와카(和歌)

和歌|와카일본어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의 나리히라 졸전(卒伝)[22]에 "기초적인 학력이 얕았으나 와카를 잘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와카에 뛰어났다.[23] 가인(歌人)으로서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30수, 칙선(勅撰) 와카 모음집에 총 87수의 와카가 실려 있다.[24] 기노 쓰라유키(紀貫之)는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 가나 서에서 나리히라를 육가선(六歌仙) 중 한 명으로 언급하며, "그 마음은 넘치나, 말이 부족하다"라고 평했다. 나리히라는 후지와라노 긴토(藤原公任)의 36가선(三十六歌仙)에도 포함되었다. 나리히라의 아들 무네하리(棟梁) ・ 시게하루(滋春), 무네하리의 아들인 모토카타(元方) 모두 가인으로 알려져 있다.

나리히라의 대표적인 와카는 다음과 같다.

  • ちはやぶる 신대(神代)에도 들어보지 못했네. 다쓰타 강(竜田川)이 고운 단풍 빛으로 물들어 있다고는. -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 『오구라 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 17번.
  • 깨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한 채 밤을 지새우고 하루를 봄의 장맛비 바라보며 보냈네 - (『고금와카집』)
  • 세상에 만약 벚꽃이 전혀 없다면 봄날의 마음은 평화로웠으리 - (『고금와카집』)
  • 잊어버리고는 꿈인가 생각했네. 생각이나 했을까, 눈을 헤치고 그대를 보게 될 줄은 - (『고금와카집』 권18, 잡가 하(雑歌下).)
  • 길들여진 겉옷을 입고, 익숙한 아내가 있기에 아득히 먼 길을 온 여행을 생각하네 - (『고금와카집』)
  • 이름에 걸맞다면, 자, 물어보리라. 도읍의 새(都鳥)야,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고 - (『고금와카집』)
  • 달인가, 옛날의 봄인가, 봄이 아닌가, 내 몸은 하나뿐인데 예전의 몸인데 - (『고금와카집』 권15, 연가5(恋歌五).)
  • 남 모르는 나의 다니는 길의 관리는 밤마다 모두 잠들었으면 - (『고금와카집』 권13, 632, 『이세 이야기(伊勢物語)』 5단.)
  • 흰 구슬인가, 무엇이냐고 사람이 물었을 때 이슬이라고 대답하고 사라져 버렸으면 - (『신고금와카집(新古今和歌集)』 권8, 851, 『이세 이야기』 6단.)


오구라 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에서의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4. 2. 연애담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이세 이야기》의 주인공인 "옛날 남자"와 동일시되어, 이 작품에 묘사된 내용이 어느 정도는 사실로 여겨져 왔다. 《일본삼대실록》 나리히라 졸전(卒伝)에는 "생김새가 수려하였으며, 방종하며 거리낌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22] 이는 《이세 이야기》에 묘사된 그의 모습과도 연결된다.

《이세 이야기》에는 몬토쿠 천황의 제1황자였지만 어머니가 후지와라 씨가 아니어서 제위에 오르지 못한 고레타카 친왕과의 교류, 세이와 천황뇨고이자 훗날 황태후가 되는 후지와라노 다카코(니조 황후), 고레타카 친왕의 누이동생으로 이세사이구였던 데시 내친왕으로 짐작되는 고귀한 여성들과의 금지된 사랑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나리히라를 고귀한 태생이면서도 반체제적인 귀공자라는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세 이야기》 성립 이후 데시 내친왕과의 밀통으로 다카시나노 모로나오가 태어났다는 설이 퍼져, 다카시나 씨가 나리히라의 자손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나리히라는 기노 아리쓰네의 딸(고레타카 친왕에게는 사촌 누나)을 아내로 맞아 기 씨와 교류하였다. 그러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마흔 생일에 축하하는 와카를 올리는 등 후지와라 씨와도 교류하였다.

4. 3. 이세 이야기와의 관계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이른 시기부터 《이세 이야기》의 주인공인 '옛날 남자'와 동일시되었고, 《이세 이야기》의 내용은 어느 정도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에 관한 사실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이세 이야기》에는 몬토쿠 천황의 제1황자였음에도 어머니가 후지와라 씨가 아니었기에 제위에 오르지 못했던 고레타카 친왕과의 교류, 세이와 천황뇨고였으며 이후 황태후가 되는 니조노 쓰보네(후지와라노 다카코)와 고레타카 친왕의 누이동생으로 이세사이구였던 테시나이 친왕으로 짐작되는 고귀한 여성들과의 금지된 사랑 등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일본삼대실록》에 묘사된 "방종불구(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분방함)"라는 구절과 맞물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지만 반체제적인 귀공자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세 이야기》 성립 이후, 덴시 내친왕과의 밀통으로 다카시나노 모로나오가 태어났다는 설이 퍼지면서, 다카시나 씨가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자손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편, 나리히라는 기노 아리쓰네의 딸(고레타카 친왕에게는 사촌 누나)을 아내로 맞아 기 씨와도 교류하였다. 그러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의 마흔 생일에 축하하는 와카를 올리기도 했으며,[13] 장남 무네야스의 딸은 할아버지의 미모를 물려받아 모토쓰네의 형인 후지와라노 구니쓰네의 아내가 된 후, 모토쓰네의 적자 도키히라의 아내가 되는 등, 특히 자손은 후지와라 씨와의 교류가 적지 않았다.

《이세 이야기》에 묘사된 "동쪽으로 내려감(東下り)"에 대해서도 그 사료성에 대한 논의가 있다. 통설에서는 귀종유리담의 일종으로 보는 설이 강하지만, 스미다 분에이는 어머니의 상중에 있던 조간 4년(862년)의 일로 보는 설이 있다.[14] 도가와 점은 사료인지 창작인지를 단정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나리히라와 아버지 아보 친왕이 중앙과 지방을 겸직하면서 동국의 국사를 맡았던 것에 주목하며, 당시 문제가 되었던 인구왕신가의 동국 진출(장원의 형성·경영)에 나리히라 주변도 관여하고 있었으며, 창작이었다 하더라도 그 배경이 되는 사실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15]

나리히라 자신도 만년에는 구로도노토(蔵人頭)라는 요직에 올랐으며, 구스코의 변으로 폐태자되었던 숙부 다카오카 친왕 등 다른 헤이제이계 황족들이나 당시의 후지와라 씨 이외의 귀족들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형 유키히라보다도 정치적으로 중추에 올랐기에 《이세 이야기》나 《일본삼대실록》의 기술에서 엿볼 수 있는 인물상과는 다소 차이점이 있다.

칙찬와카집에 80수 이상이 수록된 육가선·36가선의 한 사람이지만, 나리히라 자신이 엮은 사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업평집》이라 불리는 것은 《후찬와카집》 성립 이후에 나리히라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단가를 모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리히라의 노래가 채집된 가집 중에서 나리히라가 살았던 시대와 가장 가까운 것은 《고금와카집》이다.

《이세 이야기》는 나리히라의 노래를 많이 사용한 가(歌)이야기이며, 나리히라상(像)에도 큰 영향을 미쳐왔다. 다음의 노래 중에도 이세 이야기의 중요한 단에 등장하는 것이 많다.

  • ちはやぶる 신대(神代)도 듣지 못했네. 다쓰타 강(竜田川)이 붉게 물들어 물에 잠기는 것을 — 『고금화가집』선가(撰歌), 『오구라 백인일수』17번.
  • 세상에 만약 벚꽃이 전혀 없다면 봄날의 마음은 평화로웠으리 — 『고금와가집』선가.
  • 잊어버리고는 꿈인가 생각했네. 생각이나 했을까, 눈을 헤치고 그대를 보게 될 줄은 — 『고금와가집』권18, 잡가 하(雑歌下).
  • 길들여진 겉옷을 입고, 익숙한 아내가 있기에 아득히 먼 길을 온 여행을 생각하네 — 『고금와가집』선가.
  • 이름에 걸맞다면, 자, 물어보리라. 도읍의 새(都鳥)야,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고 — 『고금와가집』선가.
  • 달인가, 옛날의 봄인가, 봄이 아닌가, 내 몸은 하나뿐인데 예전의 몸인데 — 『고금와가집』권15, 연가5(恋歌五).
  • 남 모르는 나의 다니는 길의 관리는 밤마다 모두 잠들었으면 — 『고금와가집』권13, 632. 또한, 『이세모노가타리』5단.
  • 흰 구슬인가, 무엇이냐고 사람이 물었을 때 이슬이라고 대답하고 사라져 버렸으면 — 『신고금화가집』권8, 851. 또한, 『이세 이야기』6단.


그러나 성립 시기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고금와카집》과 《이세 이야기》 양쪽에 채록된 와카 가운데는 배경을 설명하는 사서 내용이 각기 다르고 와카 자체도 미묘하게 바뀌어 있는 것이 있다. 《이세 이야기》보다 이른 시기에 성립된 칙선 와카 모음집인 《고금와카집》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세 이야기》 내용을 필사하는 단계에서 개변이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칙찬 와카 모음집인 《고금와카집》에서도 나리히라의 와카는 다른 가인의 것보다 사서(詞書)가 이상하게 긴 것이 많아서 그 취급이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이다.

5. 유산 및 영향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묘소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중세 시대에 그는 신(가미) 또는 부처 다이니치 뇨라이의 화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나리히라의 묘로 알려진 일부 장소는 실제 매장지라기보다는 그에게 봉헌된 신성한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19] 간사이 대학교 교수이자 《이세 이야기》 연구자인 山本登朗|야마모토 토쿠로일본어는 교토 동부 요시다 신사의 요시다 산에 있는 業平塚|나리히라즈카일본어로 알려진 작은 석조 숲이 그러한 장소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19] 그는 이 장소가 나리히라와 연관된 것은 중세 시대에 나리히라의 사생아로 널리 알려진 요제이 천황의 묘소 근처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19] 전통적으로 나리히라의 묘로 여겨지는 또 다른 장소는 교토 서부의 十輪寺|주린지일본어이며, なりひら寺|나리히라데라일본어로도 알려져 있다.[22]

요시다 산 묘소


주린지 묘소


나리히라는 개인 시집인 ''나리히라슈''|나리히라슈일본어를 남겼으며,[23] 이는 ''산주로쿠닌슈''|산주로쿠닌슈일본어에 포함되었다.[24] 이 시집은 10세기 중반 ''고센 와카슈'' 편찬 이후 후대 편집자에 의해 엮어진 것으로 보인다.

10세기 초 ''고킨와카슈''에는 나리히라의 시 30수가 실렸으며, 이후 시가집에도 더 많은 시가 수록되었지만, 귀속에 대한 의문이 있다. 키노 쓰라유키는 ''고킨와카슈''의 가나 서문에서 나리히라를 이전 시대의 중요한 시인인 육가선 중 한 명으로 언급했다. 그는 또한 후지와라노 킨토의 후대 36가선에도 포함되었다.

''고센와카슈''가 나리히라에게 귀속시킨 11수의 시 중 몇몇은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작품이었다. 예를 들어 두 수는 후지와라노 나카히라의 작품이었고, 한 수는 오시코치노 미츠네의 작품이었다. ''신고킨와카슈''와 이후의 칙선집들은 나리히라에게 더 많은 시를 귀속시켰지만, 이 중 많은 시들은 ''이세 이야기''에 등장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으로 오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중 일부는 나리히라 사후에 쓰여졌을 것이다. 궁정 시가집에 나리히라에게 귀속된 시의 총수는 87수이다.

나리히라의 시는 후지와라노 테이카의 ''오구라 백인일수'' 17번에 수록되었다. 이 시는 카루타의 주인공인 아야세 치하야의 "명함"으로 사용되어 만화와 애니메이션 치하야후루에 자주 등장하며, 그 역사와 의미가 논의된다.

《이세 이야기》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를 중심으로, 그가 지은 시와 시의 영감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엮은 모음집이다. 나리히라는 한때 이 작품의 저자로 널리 여겨졌지만, 학자들은 이러한 귀속을 거부하게 되었다. 케인(Keene)은 나리히라가 원래 그의 시와 다른 사람들의 시를 바탕으로 일종의 창의적인 자서전 형태로 작품을 썼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사후에 어떤 후대 작가가 그의 원고를 발견하여 확장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아마도 그를 모델로 했을 것이다. 작품 자체는 현재의 형태와 유사하게 10세기 중반경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나리히라의 사후 수십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작품의 구성에는 세 단계가 확인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나리히라가 실제로 지은 시를 주로 기반으로 하며, 제공된 배경 세부 사항은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나리히라의 시가 아닐 수도 있고 사실보다 허구의 비중이 더 높은 시들이 첫 번째 레이어에 추가되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에서는 어떤 후대 작가가 나리히라의 이름을 사용하고 그를 과거의 전설적인 인물로 취급했다.

11세기 후반의 사고로모 이야기는 《이세》를 변형된 이름인 "자이고 주조의 일기"(나리히라의 일기)로 언급한다.

칙찬와카집에 80수 이상이 수록된 육가선·36가선의 한 사람이지만, 자선 사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업평집』이라 불리는 것은 『후찬와카집』 성립 이후에 업평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단가를 모은 것으로 여겨진다. 업평의 노래가 채집된 가집 중에서 업평이 살았던 시대와 가장 가까운 것은 『고금와카집』이다. 또한 『이세 이야기』는 업평의 노래를 많이 사용한 가(歌)이야기이며, 업평상에도 큰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고금와카집』과 『이세 이야기』 모두에 채집된 노래 중에는 배경을 설명하는 사서의 내용이 각각 다르고, 노래 자체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도 있다. 『이세 이야기』보다 성립이 빠르고 칙찬와카집인 『고금와카집』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시대가 흐르면서 『이세 이야기』의 내용이 서사 단계에서 고쳐 쓰여진 것인지, 현재로서는 불명이다. 덧붙여 칙찬의 『고금와카집』에 있어서조차 업평의 와카는 다른 가인에 비해 사서가 이상하게 긴 것이 많고, 그 취급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이다.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저택지, 교토시 나카교구


나리히라를 모델로 한 인물은 다양한 이야기와 문헌에 등장한다. 나리히라와 관련된 전설은 각지에 전해지고 있다.

지역전설 내용
나라현나라시후타이지는 닌메이 천황의 칙원을 받아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개기했다. 절의 전승에 따르면 후타이지는 원래 헤이제이 천황이 야쿠시의 변 이후 삭발하고 은거한 아야노고쇼였다고 한다. 헤이제이 천황의 황자 아보 친왕과 그의 아들인 나리히라도 이 땅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나라현 덴리시, 이카루가정, 오사카부야오시덴리시 이치노모토초의 아리와라 신사는 나리히라의 탄생지이며, 『이세 이야기』 23단 쓰쓰이쓰쓰의 유래지이기도 하다. 경내에는 쓰쓰이쓰쓰에서 나리히라(와 동일시되는 남자)가 어린 시절 아내와 놀았다고 전해지는 우물이 있다. 아리와라 신사 서쪽에는 나리히라가 타카야스 땅에 사는 여성에게 다녔다고 전해지는 나리히라 길(요코오지, 타쓰타 길)이 뻗어 있다. 이 타카야스가 어디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정 타카야스와 오사카부야오시타카야스의 2설이 있다. 타쓰타에서 카와치국 타카야스군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는, 오아테군(오사카부 카시와라시)을 경유했다는 설과 헤구리정의 토산고개를 넘었다는 설이 있다. 슌토쿠 가도・주산 가도도 참조.
아이치현지류시 야하시이세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명. 현재의 지류시 야하시정. 무료수사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오치다카 나카의 한 그루의 소나무에서 창포의 노래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자이겐지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유골을 나누어 칸페이 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자이겐즈카를 지키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 후 가마쿠라 말기경에 공양탑도 건립되었다. 현재 아이치현의 현화가 창포로 지정된 것은 이 고사에 기인한다.[20]
나리히라바시 (도쿄도스미다구, 사이타마현카스카베시, 효고현아시야시, 나라현이카루가정), 코토토이바시
교토부교토시교토시 니시쿄구에 있는 주린지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만년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절로, 나리히라데라라고도 불린다.
시가현타카시마시타카시마시 마키노초 아리와라에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만년에 은둔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나리히라의 묘로 전해지는 탑이 있다.
기후현후와군타루이정880년 미노 곤노카미로 임명되어, 미노 고쿠후에 부임했을 때 오사에 관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그 해에 나리히라가 사망하자, 천황의 칙원에 의해 관터에 나리히라데라가 창건되었다. 1783년에 에이헤이지의 텐카이 화상이 나리히라데라를 재흥했다. 현재는 아리와라산 야쿠시지[21]가 되었다.


6. 관련 문화

나리히라는 여러 이야기와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와 관련된 전설은 일본 각지에 전해지고 있다.

; 나라현 나라시

: 나라시 호렌초에 있는 후타이지는 닌메이 천황의 명을 받아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절의 전승에 따르면 후타이지는 원래 나리히라의 할아버지인 헤이제이 천황이 야쿠시의 변 이후 삭발하고 은거한 '아야노고쇼'였다고 한다. 헤이제이 천황의 아들 아보 친왕과 그의 아들인 나리히라도 이 땅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 나라현 덴리시, 이카루가정, 오사카부 야오시

: 덴리시 이치노모토초의 아리와라 신사는 나리히라의 탄생지이며, 《이세 이야기》의 23단 '쓰쓰이쓰쓰'의 유래지이기도 하다. 경내에는 쓰쓰이쓰쓰에서 나리히라(와 동일시되는 남자)가 어린 시절 아내와 놀았다고 전해지는 우물이 있다. 아리와라 신사의 서쪽에는 나리히라가 타카야스 땅에 사는 여성에게 다녔다고 전해지는 나리히라 길(요코오지, 타쓰타 길)이 뻗어 있다. 다만 이 타카야스가 어디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정 타카야스와 오사카부 야오시 타카야스의 두 가지 설이 있다. 또한, 타쓰타에서 카와치국 타카야스군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는, 오아테군(오사카부 카시와라시)을 경유했다는 설과 헤구리정의 토산고개를 넘었다는 설이 있다.

; 아이치현 지류시 야하시

: 《이세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현재의 지류시 야하시정이다. 무료수사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오치다카 나카의 한 그루의 소나무에서 창포의 노래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자이겐지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유골을 나누어 간표 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자이겐즈카를 지키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 후 가마쿠라 말기경에 공양탑도 건립되었다. 현재 아이치현의 현화가 창포로 지정된 것은 이 이야기에 기인한다.[20]

; 나리히라바시 (도쿄도 스미다구, 사이타마현 카스카베시, 효고현 아시야시, 나라현 이카루가정), 코토토이바시

: 스미다구와 카스카베시에 나리히라바시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스미다구의 다리에 대해서는 나리히라바시 (스미다구)를 참조. 스미다구에는 코토토이바시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것도 앞서 언급한 이세 이야기 9단이 유래이며, 나리히라가 읊은 노래에 '이자 코토 토와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에 기인한다. 아시야시의 아시야강의 나리히라바시, 이카루가정의 토미오강의 나리히라바시도 있다. 아사쿠사 거리에 있는 나리히라바시에 인접한 도부 철도의 역은 예전에는 '나리히라바시역'이라고 불렸다.(현재는 역 인접지에 도쿄 스카이 트리가 건설되어, 도쿄 스카이 트리역으로 개명)

; 교토부 교토시

: 교토시 니시쿄구에 있는 주린지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만년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절로, 나리히라데라라고도 불린다.

; 시가현 타카시마시

: 타카시마시 마키노초 아리와라에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만년에 은둔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나리히라의 묘로 전해지는 탑이 있다.

; 기후현 후와군 타루이정

: 880년 미노 곤노카미로 임명되어, 미노 고쿠후에 부임했을 때 오사에 관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그 해에 나리히라가 사망하자, 천황의 칙원에 의해 관터에 나리히라데라가 창건되었다. 1783년(덴메이 2년)에 에이헤이지의 텐카이 화상이 나리히라데라를 재흥했다. 현재는 아리와라산 야쿠시지[21]가 되었다.

7. 각주

その心あまりて、ことばたらず。しぼめる花の色なくて、にほひ残れるごとし|소노 코코로 아마리테, 코토바 타라즈. 시보메루 하나노 이로 나쿠테, 니오이 노코레루 고토시일본어

참조

[1] 서적 Ariwara no Narihira: Ōchō no Playboy
[2] 웹사이트 Hyakunin Isshu: poem 17, One Thousand Summers https://onethousands[...]
[3] 서적
[4]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5] 서적 日本三代実録 862-04-06 #貞観4年3月7日 -> 862년으로 추정
[6] 서적 藤原高子の生涯, 陽成天皇の退位 東京堂出版 1970
[7] 논문 在原業平の歌人的形成-良房・基経執政期の政治情勢における- 桜楓社 1968
[8] 서적 天才作家の虚像と実像 在原業平・小野小町 新典社 1991
[9] 서적 日本三代実録 알수없음
[10] 서적 在原業平 東京堂出版 2004
[11] 서적 勅撰作者部類
[12] 문서
[13] 문서
[14] 서적 王朝の映像 東京堂出版
[15] 서적 在原業平伝説 東京堂出版 2000
[16] 서적 三十六人歌仙伝
[17] 서적 近衛府補任
[18] 서적
[19] 서적 系図纂要
[20] 웹사이트 あいちのシンボル https://www.pref.aic[...] 愛知県 2020-04-25
[21] 웹사이트 薬師寺 http://www.tarui-kan[...] 垂井町観光協会 2015-07-16
[22] 서적 일본삼대실록 알수없음
[23] 서적 在原業平 東京堂出版 2004
[24] 서적 칙찬작자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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